식민지 조선에서 잠견(蠶繭)의 생산과 유통
- 발행일 : 2023-06-09
- 저자 : 박이택
- 연번 : WP202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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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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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단)낙성대경제연구소
식민지 조선에서 잠견(蠶繭)의 생산과 유통
박이택(낙성대경제연구소)
<머릿말>
한국은 양잠을 하기에 좋은 기후적 조건을 가지고 있었지만, 1910년 이전에는 크게 성행하지 못했다. 잠견으로부터 생산된 생사로는 비단을 만드는데, 이것을 생산하는 데에는 많은 노동이 들어가기 때문에, 최고급의 비싼 의류로 평가받는다. 양잠업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이와 같은 값비싼 비단에 대한 수요가 커야 하는데, 조선은 양잠업이 발전하는데 필요한 큰 비단 시장을 가져본 적이 없다. 중국은 상대적으로 큰 비단 시장을 바탕으로 양잠업이 발전하였으며, 규모의 경제와 특화의 이득에 기반한 비단생산의 집적체계를 만듦으로써 비단 생산의 경쟁력을 확보하여, 전근대 조선의 시장을 공략하는데 성공하였기 때문에 조선이 양잠업을 발전시키는 데 필요한 시장적 기반은 더 취약해졌다.
조선에서 본격적으로 양잠업이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식민지 시대에 들어서였다. 미국은 19세기 후반부터 견직물에 대한 수요가 늘었지만, 그 원료인 생사를 자급하지는 못하여서, 막대한 수입수요를 창출하였는데, 일본은 그 시장에 지배적인 수출국가로서의 입지를 확립하면서 1909년에는 세계1위의 생사수출국가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 세계 생사시장은 일본과 중국과 인도가 각축을 벌이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수출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보다 저렴한 잠견 생산지가 필요하였으며, 1905년 일본의 보호국이 되었던 조선은 그와 같은 요구에 맞는 최적지였다.
식민지 시대에 조선의 잠견 생산량은 괄목할 만큼 성장하였다. 1910년 공식적으로 조사된 산견량은 1만 3931석이지만, 조선총독부도 이것은 과소하게 조사된 것으로 평가하면서, 대체로 3만석 정도가 생산되고 있다고 보았다. 1910년의 산견량을 30,000석으로 보고, 1석을 8관으로 환산하면, 24만관을 생산했다고 할 수 있는데, 1939년에는 그보다 24배 많은 567만 8천여관을 생산하게 되었다. 29년동안 연평균 성장률은 11.50%였으며, 1939년에는 세계 제4위의 산견국이 될 수 있었다.
일본은 한국전쟁을 계기로 경제부흥의 단서를 잡게 되고, 이후 고도성장의 가도를 달리면서, 1960년대에는 소득 증대에 기반하여 전통적인 고급의상인 기모도 열풍이 전 일본을 덮치면서 일본은 세계에서 가장 큰 생사 수입수요를 창출하였는데, 당시 한국은 크게 성장하고 있던 일본의 시장을 공략하는데 성공하여 1970년대에는 세계 3위의 생사수출국의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고, 생사수출대금은 경제성장을 위해 필요한 외화의 주요한 원천이 되었다. 식민지기 양잠업과 제사업의 발전은 이렇듯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주요한 생사 생산 대국으로 한국이 발돋움하는데 밑받침이 되기도 하였다는 점에서, 식민지기 한국의 양잠업은 어떻게 성장하게 되었으며, 그것이 가지고 있는 구조적 특질은 무엇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본 논문의 구성을 간략하게 소개하여 둔다. 제2절에서는 조선의 양잠업의 장기추이를 일본과의 비교 속에서 살펴본다. 일본과의 비교 속에서 살펴보는 이유는 당시 조선의 양잠업은 일본의 양잠업을 캐취업하면서 발전하였기 때문이다. 당시 조선의 양잠농가는 기술의 캐치업을 할 수는 있었지만, 양잠경영의 영세성을 벗어나지는 못했다. 왜 기술의 캐치업은 했지만, 경영의 영세성을 벗어나지는 못했는가? 제3절과 제4절에서는 기술의 캐치업에 대해 고찰하고, 제5절에서는 양잠농가의 영세성에 대해 고찰한다. 제3절에서는 조선 양잠업이 29년동안 연평균 11.5%로 고도성장을 할 수 있었던 경쟁력의 원천에 대해 살펴보고, 제4절에서는 그와 같은 고도성장을 하는데 있어 조선총독부가 수행한 역할에 대해 살펴본다. 제6절에서는 본 논문의 내용을 요약하는 것으로 결론을 대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