設立 目的과 背景

  • 1987년 4월, 安秉直 교수(서울대)와 李大根 교수(성균관대)는 經濟史 專攻 연구자의 共同硏究를 振作하기 위한 ‘硏究所’ 설립에 합의하고, 필요한 최소 資金을 공동 出捐키로 하다(각 20백만원 씩 出捐).
  • 1987년 5월, 서울大 後門 入口 낙성대공원 부근에 硏究室을 마련하고(住所 : 서울시 관악구 봉천7동1625-31호), 설립 준비에 들어가다.
    硏究所 명칭을 ‘落星臺硏究室’로 정하고, 同年 8월 27일 開所式을 갖다.
  • 硏究所의 硏究員은 대체로 安秉直 교수가 以前에 서울大 經濟學科 大學院에서 지도해오던 韓國經濟史 연구모임/세미나 멤버를 主軸으로 하여 구성하다.

組織과 運營

  • 硏究所는 正會員, 準會員, 財政委員으로 구성하고, 正會員은 大學 專任講師 급 이상 및 그에 준하는 자, 準會員은 대학원 碩/博士 과정의 학생 및 그에 준하는 자로 하고,
    설립 당초 硏究人力은 정회원 16명, 준회원 18명으로 시작하다.
  • 財政委員은 일정 규모 이상의 硏究所 財政을 지원하는 자로 함. 초기 財政委員은 金鴻植(作故, 慶熙大 교수)를 비롯하여, 李鍾台, 林武炫, 朴源培, 洪龍粲, 朴敬浩 등 財界人士를 포함한 6명으로 하다.
  • 硏究所의 운영원칙은 正會員으로 구성되는 總會에서 결정하며, 특별히 硏究所에 所長이나 室長 등의 職責을 두지 않는다. 단지 行政實務를 담당할 약간 명의 幹事나 助敎를 둔다.
  • 설립 초기에는 落星臺硏究室을 ‘本室’로 하고, 이전의 서울대 내의 經濟史 硏究會를 ‘分室’로 하는 二元體制로 운영하다. 1989년에 分室 쪽의 殘務 정리와 함께 本室에 통합하다.
  • 硏究所의 運營經費는 財政委員의 出捐金, 會員의 會費, 기타 收入 및 補助金 등으로 충당한다. 초기 正會員의 會費는 月 1만원으로 정하다 (단 準會員은 免除).

初期 硏究活動과 實績

  • 硏究所의 연구활동은 연구자의 專攻 분야별로 구분하여, 開港期와 植民地期를 연구대상으로 하는 ‘近代史 分科’와 해방 후 韓國經濟를 분석대상으로 하는 ‘現代史 分科’의 2개 연구팀을 설치, 운영하다.
  • 초기 硏究所 활동 중에 特記할만한 일은 1987~1990년간에 수행된 한국근대경제사 硏究를 위한 ‘韓-日共同硏究會’의 활동을 행정적으로 지원한 일이다.
    연구소의 主力 멤버가 참가한 동 硏究會의 연구 결과는 나중에 韓, 日 두 나라 언어로 각각 3권의 單行本으로 출간하다. (後述 참조)

1. 近代史 硏究分科

  • 서울대 대학원 연구/세미나모임의 後身이라 할 近代史分科는 1985년 2월부터 1988년 4월까지 그 계속사업으로
    ① 韓國經濟史의 硏究史 정리, ② 經濟史 관련 理論書의 學習, ③ 植民地半封建社會論(소위 ‘植半論’) 검토의 3가지 主題를 주로 다루다.
  • 近代史 分科는 月 1회 세미나 개최를 定例化하고, 이상의 硏究史 整理와 ‘植半論’ 연구는 물론, 각 대학/대학원의 經濟史 전공자의 碩/博士 學位論文을 예비 발표토록 하는 기회를 제공하다.
  • 1988년 ‘韓日共同硏究’ 사업의 추진과 함께 近代史 分科는 연구의 中心이 植民地 시대 연구로 이동하고, 이 시기 식민지기 연구 실적은 총 15건에 이르다.

2. 現代史 分科/經濟政策硏究팀

  • 해방 후 경제사 연구를 대상으로 하는 現代史 分科는 자체 硏究人力의 부족과 與件 不備로 硏究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치지 못하다.
    基礎 資料의 수집 정리와 더불어 현실의 經濟動向 파악을 위한 ‘政策硏究팀’을 가동하고 外部 전문가를 초빙하여 國內外 時事 및 政策이슈를 다루는 세미나 개최에 주력하다.
  • 現代史 分科는 ‘勞動연구팀’을 구성하여 韓國經濟硏究院(全經聯 산하)의 연구비 지원을 받아 1988∼89년간 韓國의 人口 및 勞動力 문제에 대한 기초 통계의 정비와 이론적 분석을 행하고, 그 결과를『韓國의 工業化와 勞動力(Ⅰ) : 統計編』및 (Ⅱ) : 分析編』으로 두 권의 조사보고서를 出刊하다.
  • 政策硏究팀에서는 月 2회 定例 세미나를 개최하고, 經濟史 관련만이 아니라 經濟理論, 경제정책과 이슈, 세계경제 동향, 사회주의권 경제동향 등 다양한 主題를 다루어 많은 성과를 내다.

3. 韓-日 共同硏究

  • 1987년 가을 한국측 安秉直교수(서울대)와 일본측 中村 哲교수(京都大)의 主動으로 植民地期 朝鮮經濟에 대한 韓-日 공동연구팀이 ‘韓國近代經濟史硏究會’란 이름으로 만들어지다. 총 15명의 연구자가 참여한 硏究會의 구성멤버는 다음과 같다. (한국측 8명, 일본측 7명).
    <한국측> 安秉直(서울대), 李大根(성균관대), 吳斗煥(仁荷大), 李榮薰(성균관대) 張矢遠(放通大), 許粹烈(忠南大), 李憲昶(고려대), 鄭在貞(放通大)
    <일본측> 中村 哲(京都大), 梶村秀樹(神奈川大), 木村光彦(名古屋學院大), 宮嶋博史(東京大), 堀 和生(京都大), 吉野 誠(東海大), 松本武祝(東京大)
  • 1988년 1월 서울에서 제1차 예비연구 세미나를 열고, 연구방법론을 비롯한 實態調査 要領, 農業팀과 工業팀의 연구 領域 설정, 作業 스케줄 및 各自의 硏究主題 選定을 논의하다.
    이후 韓, 日 양국을 번갈아 상호 방문하며 數次의 共同세미나를 개최하고 각자의 집필내용을 검토한 다음 硏究書 3권을 양국에서 동시 발간하다.
    ①『近代朝鮮의 經濟構造』(비봉출판사, 1989)
    ②『近代朝鮮水利組合硏究』(一潮閣, 1992)
    ③『近代朝鮮工業化의 硏究』(一潮閣, 2003)
  • 硏究所 설립 직후 이루어진 이 韓-日 共同硏究는 연구소의 位相 定立에 중요한 역할을 한 셈이다. 비록 일본측(豊田財團)의 硏究費支辨으로 행해진 프로젝트이지만, 長期에 걸친 대규모 국제적 共同硏究프로젝트를 수행하는데 硏究人力의 대부분을 연구소 멤버로 충당하고, 또 대규모 프로젝트를 직접 主管하여 소화해냄으로써 硏究所의 硏究 및 行政 力量을 크게 향상시킬 수 있었다고 하는 점에서 그러하다.

社團法人으로의 昇格

  • 硏究所가 1987년 ‘落星臺硏究室’이란 소박한 이름으로 문을 연 이래 1994년까지 다양한 主題로 수준 높은 연구업적을 내고, 硏究所의 대외적인 位相도 크게 올라가다.
    본래적인 經濟史 연구만이 아니라 그 밖의 분야에 대한 연구활동도 괄목할만한 수준에 이르고, 또 3,500여종에 달하는 資料/文獻의 발굴/수집도 큰 성과라고 할 수 있다.
    거기에 1989년부터 硏究所 멤버의 대부분이 회원으로 가입 되어있는 ‘經濟史學會’의 행정사무를 委任받아 代行하고 있는가 하면, 韓國經濟(史) 연구를 위해 들어오는 외국 유학생이나 연구자들을 위한 資料/情報의 제공은 물론, 연구를 위한 세미나 개최 등 협력과 지원사업도 내세울만한 연구소 業績이라 할만하다.
  • 연구소 활동이 이처럼 확대, 강화됨에 따라 연구소의 조직을 근본적으로 개편해야만 했다. 즉 지금 같은 同學 상호간의 任意단체적인 ‘落星臺硏究室’이란 이름으로는 더 이상 硏究力量을 높이고 나아가 연구소의 확대, 발전을 기하기에는 아무래도 한계에 이르렀다는 자체 평가에 이르다.
    이런 요구를 받아들여 硏究所는 지금의 ‘낙성대연구실’이란 간판을 내리고, 法人格을 부여하는 ‘社團法人 落星臺 經濟硏究所’로 改名하기로 결정하고, 1994년 2월 所管 부서(경제기획원) 앞으로 法人設立申請書를 제출하여 同年 3월 10일 정부의 認可를 받았다.
  • 法人으로 昇格함에 따라 硏究所의 조직과 운영방식이 크게 바뀌었다. 종전에는 行政實務를 담당하는 幹事/助敎 정도의 責任者를 두었는데, 이제 會員, 總會, 理事會, 理事長, 所長 등 조직과 운영원칙을 규정하는 民法 상의 ‘定款’을 제정하고, 이 定款에 준거하여 연구소를 운영해야만 하게 되었다.
    法人 설립 초기 硏究所 會員은 金洛年, 金承郁, 金泰東 등 모두 33명이고, 理事會는 安秉直, 李大根, 李鍾台, 林武炫 등 10명으로 구성하다. 초대 이사장 겸 소장으로는 李大根 이사를 선임하다.

法人 設立 이후의 硏究活動

  • 1994년 法人 昇格과 더불어 연구소의 性格이나 位相이 많이 변하였다. 무엇보다도 재정적으로 외부로부터의 연구비 지원을 하는 篤志家가 늘어났다.
    그 중에서도 2005년 3월 대주전자재료주식회사(社主 林武炫)로부터 當社 柱式 107,210株의의 연구소 기증은 빈약한 연구소 基金을 확충하는데 하나의 金字塔을 쌓은 격이었다.
    그에 따라 硏究課題도 한국경제의 현상과 문제점을 분석하고, 그를 위한 政策課題와 代案을 모색하는 방향으로 바뀌게 되었다.
  • 이 시기 정책연구팀에서는 月 2회 정규적인 세미나 프로그램을 짜고, 學界나 硏究所 인사만이 아니라 官界, 財界 등 각 분야의 전문가를 초청하여 활발한 발표/토론회를 가졌다.
    세미나 결과를 단행본으로 묶어낸 대표적인 論著가 『韓國經濟, 새 패러다임 摸索』(한울, 1995)연구서라 할 수 있다.
    그와 함께, 1997년 3월 제2기 硏究所 집행부 改編이 행해지다. 1994년 설립 후 李大根 이사가 맡아오던 理事長과 所長 직을 安秉直 이사와 具石謨 이사에게 넘기다.
    아울러 연구소 활동이 활발해짐에 따라 연구소에 有給 助敎 시스템을 도입하고 대학원 박사과정 학생들을 助敎로 기용하다.
  • 2000년대에 들면서 연구소는 다시 한 번 변화를 겪게 된다. 종전의 한국경제 관련 政策硏究 비중이 현저히 줄어든 대신, 韓國經濟史 연구라는 本然의 자세로 돌아왔음이 그것이다.
    그에 따라 硏究所의 집행부 구성도 바뀌었다. 2000년 安秉直 이사장은 朴德濟 이사에게, 具石謨 소장은 李榮薰 이사에게 각각 그 직을 인계하다. 이는 단순한 交替라기 보다는 일종의 世代交替的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安秉直/李大根 이사 등 創立 당시의 제1세대가 물러나고, 다음 세대인 朴德濟/李榮薰 이사 등이 연구소 운영 책임을 맡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 이 무렵부터 연구소의 연구방침은 외부의 연구비 지원을 받아 長期 연구프로젝트를 추진하는 방향으로 바뀌었다. 이는 주로 ‘學術振興財團’(現 韓國硏究財團)의 연구비 지원으로 이루어졌는데, 예컨대 兩班家의 生活日記를 자료로 한 農村社會經濟史 事例 연구(1999-2002년)를 비롯하여, 18~20세기 人口, 生産, 所得 등 기초 통계의 수집, 정리 및 推計 사업(2002-2005년), 財政 자료를 이용한 朝鮮王朝의 經濟體制 연구(2005-2008년), 해방 전후기 경제통계의 정비(2007-2009년) 등의 연구과제를 수행하다.
    이와 함께, 일본 豊田財團 연구비 지원으로 戰時期/解放期(1937~1950년) 韓國 農村社會의 변동(2005-2008년)과 같은 硏究 과제도 수행하다.
    현재는 韓國硏究財團의 연구비 지원으로 20세기 동아시아의 생활수준 비교 연구(2010-2013년)를 수행하고 있다.
  • 연구활동이 갈수록 활발해짐에 따라 자연히 硏究所 空間 문제가 제기되지 않을 수 없었다. 늘어나는 硏究員의 硏究空間 만이 아니라 축적되는 文獻/資料의 보관문제도 당면의 애로사항이었다. 이에 연구소를 보다 넓은 곳으로 옮기기로 하고, 2005년 5월 서울시 관악구 봉천본동 933-6번지에 새 연구실을 마련하고 이사하다.
    새 연구실에서는 專任 硏究員이 자기 룸을 가질 정도로 연구공간이 넓어지고 분위기도 많이 호전되었다.
  • 2011년 6월 현재의 硏究所 陣容은 理事長 李榮薰 교수(서울대 경제학부), 所長 金洛年 교수(東國大 경제학부)가 맡고 있으며, 전문 연구위원으로 이우연, 류상윤 박사, 객원연구원으로 박환무, 연구원으로 김대현, 홍제환(대학원 박사과정) 등을 두고 있다. 아울러 當 硏究所는 韓國經濟(史)에 대한 역사적 조사/연구를 행하는 연구자들이 공동으로 만든 私設 硏究所로서는 他의 追從을 不許하는 연구업적을 내고 있다고 자부한다. (李大根 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