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4년 일본 에무카에(江迎) 탄광에 동원된 조선인 坑內夫와 工作係의 임금
이우연
1939년 9월부터 1945년 3월까지 조선인 근로자가 일본으로 전시노동자로 동원되었다. 통설에 따르면 조선인들의 노동은 “강제노동=노예노동”이었다. 일본인과 달리 조선인을 차별하여 임금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강제저금, 송금, 세금 등으로 모두 빼앗겨 손에 쥐는 것이 없었으며, 근로현장에서는 감금생활을 하였다는 것이다(朴慶植 1965; 전기호 2003).
이우연(2016)은 지금까지 공간된 자료들을 이용하여 강제저금 등 여러 공제 항목이 있었지만, 조선인 근로자들은 임금의 4할 이상을 현금으로 수취하고, 그것을 조선의 가족에게 송금하거나 현지에서 소비하는 데 사용하였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이우연(2019)는 본고에서 이용하는 에무카에(江迎) 탄광의 문서 중 하나인 「運炭係 賃金臺帳(운탄계 임금대장)」을 이용하여 민족 간 공제금의 차이가 발생하는 데에 강제저금의 차이는 그리 중요하지 않고 기숙사 식비가 더 큰 영향을 미쳤으며, 저금은 부양가족의 수에 따라 결정된다고 주장하였다.
본고의 과제는 이우연(2019)이 이용하지 않은 「坑內 賃金臺帳(갱내 임금대장)」과 「工作係 賃金臺帳(공작계 임금대장)」을 이용하여 그의 주장과 기타 선행연구를 검증하는 것이다. 먼저 성과급인 갱내부의 임금을 분석하고, 그 뒤에 운탄계와 마찬가지로 정액급이 적용되는 공작계 임금에 대해 살펴본다. 먼저 자료를 해설하고, 갱내부와 공작계 각각의 임금, 공제금, 인도금액을 고찰한다.
에무카에 탄광은 20세기 전반, 당시 일본의 신흥재벌인 닛소(日本窒素)가 보유한 유일한 탄광으로서 1925년에 개갱(開坑)하였다. 이 탄광의 개발이 이처럼 늦은 것은 탄층이 얇아 수익성이 낮고 기계화에 적합하지도 못하였기 때문인데, 이후 제철에 사용되는 고점결성(高粘結性) 석탄 산지의 탄광으로서 일본에서 유일하여 대정(大正) 연간부터 국가의 정책적 관심을 받게 되었다. 위치는 현재 사세보시(佐世保市) 에무카에정(江迎町)인데, 제2차세계대전 당시에는 기타마츠우라군(北松浦郡)에 속하였다. 사세보, 기타마츠우라 등은 기타마츠탄전(北松炭田)에 속하며, 이는 치구호탄전(筑豊炭田)과 함께 기타큐슈(北九州)의 대표적 탄전이다. 에무카에 탄광은 1944년 경, 광부수 1,500여 명, 연간출탄량(年間出炭量) 20만 톤을 넘어서는, 당시 바로 우측에 있던 쓰미토모센류(住友潛龍) 탄광과 함께 기타마츠탄전에서 수위를 다투었다.
에무카에 탄광의 전시동원 조선인의 고용은 1939년부터 시작되었다. 그해 150명, 1940년에는 200명, 1941년에는 200명의 모집이 승인되었고(中央協和會 編 1942), 1941년 3월 말까지의 고입(雇入)총수는 294명, 당시 재적자 수는 226이었다. 1942년 6월 말 현재 고입총수는 639명, 재적자는 348명이었다(中央協和會 編 1943). 본 연구에서 사용하는 자료에 비추어 볼 때, 1944년의 재적자 수는 4백 명 이상으로 보이지만, 그 수를 확정할 수 있는 자료는 없다.